양창호 칼럼(112)/공급사슬관리(SCM)와 항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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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문

양창호 칼럼(112)/공급사슬관리(SCM)와 항만

호주의 로스 로빈슨(Ross Robinson)교수는 항만 기능의 파라다임이 변하고 있다고 지적하고 있다. “항만은 해상운송과 육상운송의 전환이 일어나는 장소라는 전통적인 기능에서 벗어나, “항만은 항만을 이용하는 하주에게 가치를 창출하고, 전달해 줄 수 있는 공급사슬의 기능을 담당하는 곳이라고 하였다. 공급사슬 관리의 진전에 따라 해륙교통의 전환 장소라는 전통적인 항만경영에서의 탈피와 변화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우선 하주의 국제물류가 어떻게 변화하고 있는지를 알아야 항만경영의 변화를 가져 올 수 있다. 세계 각지에서 원자재 및 부품을 조달하고, 세계적으로 분업화된 생산 활동을 원활하게 연결하고, 전 세계 판매 시장에서의 경쟁력을 높여 나가기 위해서는 고도의 공급사슬 형성이 필수적이다. 글로벌 시대에 전 세계적으로 퍼져있는 복잡한 공정을 시스템으로 관리하는 것이 공급사슬 관리이다.

수요를 전망하여 대량으로 싸게 제품을 생산하고 신속하게 수송하는 것을 우선으로 했던 물류에서, 소비자의 요구에 따른 생산 및 배송을 세밀하게 동기화하는 물류, 즉 공급사슬관리로 진화하였다. 즉 글로벌 시대의 시장에서의 가치창조는 제품의 생산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시장의 요구에 치밀하게 대응하는 물류산업에 의해 이루어지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하주의 공급사슬관리 전략에 따라 항만의 기능도 진화해야 한다. 항만이나 터미널의 효율성이 개선되더라도, 배후지역에 이르는 항만을 포함한 공급사슬이 우수하지 않으면 항만이 시장에서 선택된다는 보증이 없기 때문이다. 항만 기능의 진화를 위해 항만물류 전략을 세워나가야 한다.

여러 논문에서 제시되는 공급사슬 전략에 부응하는 항만물류 전략은 크게 두 가지로 요약될 수 있다. 하나는 초대형선이 기항하는 허브항만을 만드는 일이고, 두 번째는 물류허브항만으로 만드는 일이다. 전자를 초대형선이 기항하는 필요조건이라 한다면, 후자는 기항한 초대형선의 양적하 화물을 하주의 요구대로 경쟁력 있게 연계하는 충분조건이라 할 수 있다.

초대형선이 기항할 수 있는 항만을 만드는 일은 생산성이 높은 항만을 만드는 것이다. 네덜란드의 로테르담 항이나 독일의 함브르크 항, 싱가포르 항의 터미널 자동화가 생산성 향상을 이끌고 있다. 비교적 소규모로 시작한 호주 브리즈번 항, 부산 신선대 등도 터미널 일부 자동화에 성공하고 있다. 무인자동화 항만은 아니더라도 세계 많은 항만들은 항만장비 확충, 항만운영시스템 고도화, 터미널 야드 규모 확대 등 터미널의 생산성을 향상시키기 위한 노력을 경주하고 있다.

한편 물류허브항만을 만들기 위해서는 배후물류단지를 개발하는 일과 항만과 내륙, 또는 다른 항만과의 연계성을 증진시키는 일이다. 물류단지의 개발은 항만이 공급사슬의 거점으로 성장하기위한 핵심 전략이다. 물류단지는 세계로 수출입 되는 제품에 대해 시장가치를 극대화하도록 시장의 움직임과 특성에 치밀하게 대응할 수 있도록 최종 유통가공, 사양 조정, 보관 등 다양한 물류활동을 제공하는 거점이다. 특히 항만은 내륙운송비를 절약할 수 있는 입지적 장점 때문에 빈번히 수출입 되는 화물의 거점이 되고 있다. 유럽이나 미국의 주요 항만 모두 컨테이너 터미널보다 큰 규모의 항만배후단지를 조성해 하주의 화물거점 요구에 부응하고 있다.

항만하역에 이은 2차 교통수단과 연계를 원활하게 하기 위한 복합운송에서의 시간과 비용면의 경쟁력을 갖추는 일이 항만물류허브를 만드는 요체이다. 유럽​​, 미국의 주요 항만은 배후 권 각지와 연결하는 도로와 철도, 내륙 수로의 정비에 적극적이다. 특히 철도와 내륙수로 운송, 연안운송, 피더운송을 민간 사업자와 제휴하여 함께 운영하는 항만이나 항만공사가 많다. 또한 철도운송이나, 피더운송, 내륙 터미널 건설에 민간과 합작 투자하는 항만공사의 움직임도 활발하다.

항만과 관련된 해운회사, 트럭운송사, 창고보관업체, 포워더, 통관업체 각자가 열심히 역할을 다하면 효율적인 항만이 되는 것으로 믿어왔다. 그러나 이는 마치 공급사슬 각자가 최선을 다해 열심히 하면 최선의 공급사슬이 되는 것으로 믿고 있는 것과 다름없다. 공급사슬관리가 필요하듯이 항만관련 공급사슬들을 하나로 묶어 관리하는 노력이 필요한 것이다. 항만이 물류단지를 개발하고, 연계운송에 투자하면서 하주의 물류서비스 일부를 제공하는 역할을 수행할 때 이것이 가능한 일이 된다.

시장 지향적 기업(market-focused firm)이란 시장의 요구에 부응하려는 자세를 가진 기업을 말한다. 항만이 항만을 이용하는 하주와 해운사의 요구에 부응할 수 있는 시장 지향적 기업이 되어야 비로써 항만이 제3자 물류서비스 제공자라는 소리를 들을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될 때 하주들은 특정 항만을 포함한 공급사슬이 시간과 비용 면에서 경쟁력, 신뢰성, 유연성을 실현할 수 있는 것으로 믿을 수가 있다.

우리나라의 항만공사나 지자체, 터미널이 과연 스스로 물류서비스제공자(LSPs)나 제3자 물류서비스제공자(3PL)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곳이 몇 군데나 될까? 우리의 항만은 글로벌 기업들의 공급사슬관리 요구에 부응하지 못한 채, 원재료를 해외에서 수입하고 임해지역 공장에서 제품을 생산하고 다시 해외로 수출하는 가공무역 경제의 거점에 머물고 있는 것은 아닌가?

이제 우리는 항만물류 정책이 항만이 경쟁 항만과의 물동량 경쟁에 몰두하게 두기 보다는, 글로벌 시대 새로운 부가가치를 창출하는 물류산업의 거점이 되는 활성화에 노력을 집중해야 할 때이다. 이렇게 되기 위해서는 항만이 하주나 선주들에게 가치를 창출해주고, 가치를 전달해 주는 거점이 되어야 한다.

항만당국과 항만공사가 나서 우리 항만이 관리자가 아니라, 글로벌 기업에게 공급사슬관리를 컨설팅하는 물류서비스 제공자로 자세가 바뀌어야 한다. 물론 하주를 위해 항만 물류단지를 개발하고, 항만과 연계수송체계를 대폭 확대하는 일은 단순히 항만공사만이 할 수 있는 일은 아니다. 항만공사가 항만구역 내 항만배후단지만 관할하고 있는 제도 하에서, 대부분의 항만배후단지가 항만의 각종 시책이 연계되지 못하고 있는 체제를 바꾸지 않고는 항만이 항만배후 물류단지를 이용한 물류서비스 제공자가 되기란 요원한 일이다. [한국해운신문, 2015년 4월 16일]